김길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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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4일, 오세철 교수는 '더 이상 당개혁을 늦출수 없습니다'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 '실무자회의'를 지지했다.<ref>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68099</ref> | * 6월 24일, 오세철 교수는 '더 이상 당개혁을 늦출수 없습니다'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 '실무자회의'를 지지했다.<ref>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68099</ref> | ||
* 7월 15일, 민중당 상임집행위원회는 '당개혁추진위 구성을 위한 실무자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길오와 최혁 등 6인을 제명했다.<ref>작성자 불명, 「개혁추진위 관련 민중당 6명 제명」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1008&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1&printNo=978&publishType=00010</ref><ref name="한겨레분석"></ref><ref>최혁은 훗날 청년진보당의 대표와 사회당의 부대표를 맡게 된다. [https://namu.wiki/w/%EC%B5%9C%ED%98%81 나무위키 최혁 문서 (r93판)] 참고.</ref> | * 7월 15일, 민중당 상임집행위원회는 '당개혁추진위 구성을 위한 실무자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길오와 최혁 등 6인을 제명했다.<ref>작성자 불명, 「개혁추진위 관련 민중당 6명 제명」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1008&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1&printNo=978&publishType=00010</ref><ref name="한겨레분석"></ref><ref>최혁은 훗날 청년진보당의 대표와 사회당의 부대표를 맡게 된다. <br>[https://namu.wiki/w/%EC%B5%9C%ED%98%81 나무위키 최혁 문서 (r93판)] 참고.</ref> | ||
* 7월 23일, 김정하, 김길오, 김선식, 김흥균, 최혁, 한승인 총 6인은 민중당 당기위원회에 '재심청구 사유서'를 보내면서 제명 처분에 대한 재심을 요구했다.<ref>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36168</ref> | * 7월 23일, 김정하, 김길오, 김선식, 김흥균, 최혁, 한승인 총 6인은 민중당 당기위원회에 '재심청구 사유서'를 보내면서 제명 처분에 대한 재심을 요구했다.<ref>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36168</re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