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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이름 金吉寤.<ref name="한자"> | 한자 이름 金吉寤.<ref name="한자">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검찰수사 발표문 (요지)」 , 『조선일보』 , 1986년 8월 31일, 2024년 11월 27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83100239110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8-31&officeId=00023&pageNo=10&printNo=20127&publishType=00010</ref> 前 서울대 민민투 위원장, 前 노동당 전국위원. 2024년 현재 코리아보드게임즈 대표. | ||
== 주의 사항 == | == 주의 사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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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 | === 1985년 === | ||
* 11월 18일,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민중민주정부 수립과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 산하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소속 서울지역 14개 대학생 190명과 함께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했으나 경찰에 의해 6시간 30분 만에 진압당했다. 기사에 따르면 김길오는 당시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었다.<ref> | * 11월 18일,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민중민주정부 수립과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 산하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소속 서울지역 14개 대학생 190명과 함께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했으나 경찰에 의해 6시간 30분 만에 진압당했다. 기사에 따르면 김길오는 당시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었다.<ref>작성자 불명, 「民正(민정)연수원 연행大學生(대학생) 名單(명단)」 , 『동아일보』 , 1985년 11월 19일, 2024년 11월 26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11900209210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1-19&officeId=00020&pageNo=10&printNo=19734&publishType=00020</ref><ref>민정당 연수원 점거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사건> 글을 참고. 점거에 나선 대학생들의 수가 김길오까지 합하여 총 191명이라는 대목의 출처도 이 글에 기반한다. 점거에 나선 대학생들의 수가 191명이라는 설명은 아래 항목의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학생만 193명'이라는 대목과 충돌하나, 출처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64 </ref> | ||
* 12월 17일, 민정당 연수원 점거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ref> | * 12월 17일, 민정당 연수원 점거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ref>작성자 불명, 「民正(민정)연수원 점거사건 기소유예자」 , 『동아일보』 , 1985년 12월 17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21700209206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17&officeId=00020&pageNo=6&printNo=19758&publishType=00020</ref>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지검 정구영 검사장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193명에 대해 '반성의 빛이 뚜렷한 학생들'이며 '수감 중에 반성문을 제출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ref>임채청 기자, 「"起訴猶豫(기소유예)학생은「반성의 빛」뚜렷" 「民正黨(민정당)연수원 점거 사건」鄭銶永(정구영) 서울地檢長(지검장)과 一問一答(일문일답)」 , 『동아일보』 , 1985년 12월 17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21700209206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17&officeId=00020&pageNo=6&printNo=19758&publishType=00020</ref> | ||
=== 1986년 === | === 1986년 === | ||
* 3월 21일, 검찰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서울대 민민투위원장을 맡았다.<ref name="한자"></ref> | * 3월 21일, 검찰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서울대 민민투위원장을 맡았다.<ref name="한자"></ref> | ||
* 4월 14일,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남부지역평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치른 남부지역평의회 결성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옆 계단에서 진행되었고, 6개 대학교 3백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ref> | * 4월 14일,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남부지역평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치른 남부지역평의회 결성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옆 계단에서 진행되었고, 6개 대학교 3백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ref>작성자 불명, 「6개大(대) 3백여명 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15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150023911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15&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08&publishType=00010</ref> | ||
* 4월 24일 및 28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김길오는 연대 김성택, 성대 조유묵, 고대 정범진 등과 광운대에서 만나 신민당 인천 집회에서 대대적인 폭력 행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체제전복"> | * 4월 24일 및 28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김길오는 연대 김성택, 성대 조유묵, 고대 정범진 등과 광운대에서 만나 신민당 인천 집회에서 대대적인 폭력 행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체제전복">작성자 불명, 「體制(체제)전복「투쟁의 날」로 정해」 , 『경향신문』 , 1986년 5월 19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19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19&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505&publishType=00020</ref> 검찰이 말하는 신민당 인천 집회는 소위 '5·3 인천사태'라 불리며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남긴 사건이다.<ref> 5·3 인천 사태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다음 신문 기사를 참고. https://www.khan.co.kr/article/200409051713381</ref><ref>5·3 인천사태 이후 관련자들을 수배하는 과정에서 위장취업을 했던 권인숙이 검거되었고, 시위 관련자들의 소재지를 추궁하기 위해 성고문이 가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615</ref> | ||
* 4월 29일, 연세대에서 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맹 창립결성대회'가 열렸다. 김길오는 이 대회에서 전국 민민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아일보는 김길오 단독으로 전국 민민투 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김길오와 김성택(연세대민민투위원장), 조유묵(성균관대민민투위원장)이 함께 전국 민민투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다.<ref> | * 4월 29일, 연세대에서 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맹 창립결성대회'가 열렸다. 김길오는 이 대회에서 전국 민민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아일보는 김길오 단독으로 전국 민민투 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김길오와 김성택(연세대민민투위원장), 조유묵(성균관대민민투위원장)이 함께 전국 민민투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다.<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百(백)40명 連行(연행)」 , 『동아일보』 , 1986년 4월 29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29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68&publishType=00020</ref><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30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300023911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30&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21&publishType=00010</ref> | ||
* '5·3 인천사태' 직후인 5월 5일, 민민투는 경찰에 의해 용공좌익세력으로 규정되었다. 경찰은 주도자급 학생들을 지명수배했고, 지명수배 명단에 김길오 역시 포함되었다.<ref> | * '5·3 인천사태' 직후인 5월 5일, 민민투는 경찰에 의해 용공좌익세력으로 규정되었다. 경찰은 주도자급 학생들을 지명수배했고, 지명수배 명단에 김길오 역시 포함되었다.<ref>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容共(용공)조직규정 警察(경찰)수배」 , 『동아일보』 , 1986년 5월 5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05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73&publishType=00020</ref> | ||
* 7월 21일, 전민학련 공동의장을 맡던 도중, 치안본부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ref> | * 7월 21일, 전민학련 공동의장을 맡던 도중, 치안본부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ref>작성자 불명, 「全民學聯(전민학련) 공동의장 金吉寤(김길오)군 구속」 , 『동아일보』 , 1986년 7월 22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722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7-22&officeId=00020&pageNo=7&printNo=19940&publishType=00020</ref> | ||
=== 1991년 === | === 199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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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6일, '실무자회의'는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ref>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 실무자 회의,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를 통해 확인 , 자료 생산 일자 1991년 6월 6일, 2024년 12월 5일 게시물 확인.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57931</ref>라는 문건을 발행하며 민중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 * 6월 6일, '실무자회의'는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ref>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 실무자 회의,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를 통해 확인 , 자료 생산 일자 1991년 6월 6일, 2024년 12월 5일 게시물 확인.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57931</ref>라는 문건을 발행하며 민중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 ||
* 7월 15일, 민중당 상임집행위원회는 '당개혁추진위 구성을 위한 실무자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길오와 최혁 등 6인을 제명했다.<ref> | * 7월 15일, 민중당 상임집행위원회는 '당개혁추진위 구성을 위한 실무자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길오와 최혁 등 6인을 제명했다.<ref>작성자 불명, 「개혁추진위 관련 민중당 6명 제명」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1008&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1&printNo=978&publishType=00010</ref><ref name="한겨레분석"></ref><ref>최혁은 훗날 청년진보당의 대표와 사회당의 부대표를 맡게 된다. [https://namu.wiki/w/%EC%B5%9C%ED%98%81 나무위키 최혁 문서 (r93판)] 참고.</ref> | ||
=== 2006년 === | === 2006년 === | ||
64번째 줄: | 64번째 줄: | ||
== 여담 == | == 여담 == | ||
* 1987년 물고문으로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는 생전에 김길오의 재판을 방청하는 소위 '방청투쟁'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박종운, 「못다 이룬 꿈 우리가 이뤄야」 , 『한겨레』 , 1989년 1월 17일, 2024년 12월 1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117002891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1-17&officeId=00028&pageNo=5&printNo=211&publishType=00010</ref> 박종철 열사가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으로서 사망 당시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다는 점<ref>김광수 기자,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아들 박종철을 만나러 떠나다」 , 『한겨레』 , 2019년 10월 19일, 2024년 12월 6일 기사 확인.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55338.html</ref>, 박종철 열사가 숨겨주려 했던 박종운 전 국회의원이 당시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서 수배중이었다는 점<ref>최규진 건강과대안 연구위원, 「부검은 정치적일 수 있다」 , 『프레시안』 , 2017년 11월 25일, 2024년 12월 6일 기사 확인.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76766</ref>, 박종철 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박종철출판사가 사회당 계열의 외곽조직으로 평가된다는 점<ref>사회당 대변인 이영기, 「안효상 박종철출판사 대표, 사회당 정책위원장 맡아」 , 『뉴스와이어』 서비스를 통해 배포, 2005년 6월 23일, 2024년 12월 1일 보도자료 확인.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59964</ref><ref> | * 1987년 물고문으로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는 생전에 김길오의 재판을 방청하는 소위 '방청투쟁'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박종운, 「못다 이룬 꿈 우리가 이뤄야」 , 『한겨레』 , 1989년 1월 17일, 2024년 12월 1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117002891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1-17&officeId=00028&pageNo=5&printNo=211&publishType=00010</ref> 박종철 열사가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으로서 사망 당시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다는 점<ref>김광수 기자,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아들 박종철을 만나러 떠나다」 , 『한겨레』 , 2019년 10월 19일, 2024년 12월 6일 기사 확인.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55338.html</ref>, 박종철 열사가 숨겨주려 했던 박종운 전 국회의원이 당시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서 수배중이었다는 점<ref>최규진 건강과대안 연구위원, 「부검은 정치적일 수 있다」 , 『프레시안』 , 2017년 11월 25일, 2024년 12월 6일 기사 확인.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76766</ref>, 박종철 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박종철출판사가 사회당 계열의 외곽조직으로 평가된다는 점<ref>사회당 대변인 이영기, 「안효상 박종철출판사 대표, 사회당 정책위원장 맡아」 , 『뉴스와이어』 서비스를 통해 배포, 2005년 6월 23일, 2024년 12월 1일 보도자료 확인.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59964</ref><ref>작성자 불명, 「한국사회당 대선후보의 정치저작물」 , 『레디앙』 , 2007년 9월 23일, 2024년 12월 1일 기사 확인. https://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11</ref>을 고려하면 김길오와 박종철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 이민정의 증언에 따르면, 김길오와 박종철은 같은 팸 소속이었다.<ref name="이민정"></ref> 박종철 열사는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ref>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18/03/20/20180320500102</ref> 이민정이 말한 '팸'은 '사회사상연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박종철 열사가 소속되어 있었던 서클이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주장도 있다.<ref>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3&art_id=19311</ref> 당시 학생운동가였던 최민의 구술 회고에 따르면, '사회사상연구회'는 '대학문화연구회'에서 떨어져나간 언더 서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https://archives.kdemo.or.kr/oral-archives/view/795 https://archives.kdemo.or.kr/upload/oralarchive/2022/202204/20220414080002353.pdf</ref> | * 이민정의 증언에 따르면, 김길오와 박종철은 같은 팸 소속이었다.<ref name="이민정"></ref> 박종철 열사는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ref>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18/03/20/20180320500102</ref> 이민정이 말한 '팸'은 '사회사상연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박종철 열사가 소속되어 있었던 서클이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주장도 있다.<ref>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3&art_id=19311</ref> 당시 학생운동가였던 최민의 구술 회고에 따르면, '사회사상연구회'는 '대학문화연구회'에서 떨어져나간 언더 서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https://archives.kdemo.or.kr/oral-archives/view/795 https://archives.kdemo.or.kr/upload/oralarchive/2022/202204/20220414080002353.pdf</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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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 외부 링크 == | ||
=== 신문 기사 === | === 신문 기사 === | ||
* | * 작성자 불명, 「民正(민정)연수원 연행大學生(대학생) 名單(명단)」 , 『동아일보』 , 1985년 11월 19일, 2024년 11월 26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11900209210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1-19&officeId=00020&pageNo=10&printNo=19734&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民正(민정)연수원 점거사건 기소유예자」 , 『동아일보』 , 1985년 12월 17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21700209206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17&officeId=00020&pageNo=6&printNo=19758&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6개大(대) 3백여명 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15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150023911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15&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08&publishType=00010 | ||
* | * 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百(백)40명 連行(연행)」 , 『동아일보』 , 1986년 4월 29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29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68&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30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300023911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30&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21&publishType=00010 | ||
* | * 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容共(용공)조직규정 警察(경찰)수배」 , 『동아일보』 , 1986년 5월 5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05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73&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體制(체제)전복「투쟁의 날」로 정해」 , 『경향신문』 , 1986년 5월 19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19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19&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505&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全民學聯(전민학련) 공동의장 金吉寤(김길오)군 구속」 , 『동아일보』 , 1986년 7월 22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722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7-22&officeId=00020&pageNo=7&printNo=19940&publishType=00020 | ||
* | * 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검찰수사 발표문 (요지)」 , 『조선일보』 , 1986년 8월 31일, 2024년 11월 27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83100239110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8-31&officeId=00023&pageNo=10&printNo=20127&publishType=00010 | ||
* 박종운, 「못다 이룬 꿈 우리가 이뤄야」 , 『한겨레』 , 1989년 1월 17일, 2024년 12월 1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117002891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1-17&officeId=00028&pageNo=5&printNo=211&publishType=00010 | * 박종운, 「못다 이룬 꿈 우리가 이뤄야」 , 『한겨레』 , 1989년 1월 17일, 2024년 12월 1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117002891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1-17&officeId=00028&pageNo=5&printNo=211&publishType=00010 | ||
* | * 작성자 불명, 「개혁추진위 관련 민중당 6명 제명」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1008&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1&printNo=978&publishType=00010 | ||
* 정영무 기자, 「'교조적 진보' 배격 세력확장 포석 민중당 '일부당원' 제명 배경」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3&printNo=978&publishType=00010 | * 정영무 기자, 「'교조적 진보' 배격 세력확장 포석 민중당 '일부당원' 제명 배경」 , 『한겨레』 , 1991년 7월 16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7160028910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7-16&officeId=00028&pageNo=3&printNo=978&publishType=00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