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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1일, 검찰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서울대 민민투위원장을 맡았다.<ref name="한자"></ref>
* 3월 21일, 검찰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서울대 민민투위원장을 맡았다.<ref name="한자"></ref>


* 4월 14일,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남부지역평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치른 남부지역평의회 결성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옆 계단에서 진행되었고, 6개 대학교 3백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ref>작성자 불명, 「6개大(대) 3백여명 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15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150023911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15&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08&publishType=00010</ref>
* 4월 14일,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남부지역평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치른 남부지역평의회 결성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옆 계단에서 진행되었고, 6개 대학교 3백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ref>작성자 불명, 「6개大(대) 3백여명 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15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150023911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15&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08&publishType=00010</ref>


* 4월 24일 및 28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김길오는 연대 김성택, 성대 조유묵, 고대 정범진 등과 광운대에서 만나 신민당 인천 집회에서 대대적인 폭력 행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체제전복">작성자 불명, 「體制(체제)전복「투쟁의 날」로 정해」 , 『경향신문』 , 1986년 5월 19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19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19&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505&publishType=00020</ref> 검찰이 말하는 신민당 인천 집회는 소위 '5·3 인천사태'라 불리며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남긴 사건이다.<ref> 5·3 인천 사태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다음 신문 기사를 참고. https://www.khan.co.kr/article/200409051713381</ref><ref>5·3 인천사태 이후 관련자들을 수배하는 과정에서 위장취업을 했던 권인숙이 검거되었고, 시위 관련자들의 소재지를 추궁하기 위해 성고문이 가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615</ref>
* 4월 24일 및 28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김길오는 연대 김성택, 성대 조유묵, 고대 정범진 등과 광운대에서 만나 신민당 인천 집회에서 대대적인 폭력 행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체제전복">작성자 불명, 「體制(체제)전복「투쟁의 날」로 정해」 , 『경향신문』 , 1986년 5월 19일, 2024년 12월 5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19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19&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505&publishType=00020</ref> 검찰이 말하는 신민당 인천 집회는 소위 '5·3 인천사태'라 불리며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남긴 사건이다.<ref> 5·3 인천 사태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다음 신문 기사를 참고. <br>https://www.khan.co.kr/article/200409051713381</ref><ref>5·3 인천사태 이후 관련자들을 수배하는 과정에서 위장취업을 했던 권인숙이 검거되었고, 시위 관련자들의 소재지를 추궁하기 위해 성고문이 가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br>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615</ref>


* 4월 29일, 연세대에서 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맹 창립결성대회'가 열렸다. 김길오는 이 대회에서 전국 민민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아일보는 김길오 단독으로 전국 민민투 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김길오와 김성택(연세대민민투위원장), 조유묵(성균관대민민투위원장)이 함께 전국 민민투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다.<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百(백)40명 連行(연행)」 , 『동아일보』 , 1986년 4월 29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29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68&publishType=00020</ref><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30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300023911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30&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21&publishType=00010</ref>
* 4월 29일, 연세대에서 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맹 창립결성대회'가 열렸다. 김길오는 이 대회에서 전국 민민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아일보는 김길오 단독으로 전국 민민투 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김길오와 김성택(연세대민민투위원장), 조유묵(성균관대민민투위원장)이 함께 전국 민민투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고 보도했다.<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百(백)40명 連行(연행)」 , 『동아일보』 , 1986년 4월 29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29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68&publishType=00020</ref><ref>작성자 불명, 「延大(연대)서 「연합示威(시위)」」 , 『조선일보』 , 1986년 4월 30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4300023911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4-30&officeId=00023&pageNo=11&printNo=20021&publishType=00010</ref>


* '5·3 인천사태' 직후인 5월 5일, 민민투는 경찰에 의해 용공좌익세력으로 규정되었다. 경찰은 주도자급 학생들을 지명수배했고, 지명수배 명단에 김길오 역시 포함되었다.<ref>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容共(용공)조직규정 警察(경찰)수배」 , 『동아일보』 , 1986년 5월 5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05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73&publishType=00020</ref>
* '5·3 인천사태' 직후인 5월 5일, 민민투는 경찰에 의해 용공좌익세력으로 규정되었다. 경찰은 주도자급 학생들을 지명수배했고, 지명수배 명단에 김길오 역시 포함되었다.<ref>작성자 불명, 「自民(자민)·民民鬪(민민투) 容共(용공)조직규정 警察(경찰)수배」 , 『동아일보』 , 1986년 5월 5일, 2024년 12월 8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505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5-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73&publishType=00020</ref>


* 7월 21일, 전민학련 공동의장을 맡던 도중, 치안본부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ref>작성자 불명, 「全民學聯(전민학련) 공동의장 金吉寤(김길오)군 구속」 , 『동아일보』 , 1986년 7월 22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722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7-22&officeId=00020&pageNo=7&printNo=19940&publishType=00020</ref>
* 7월 21일, 전민학련 공동의장을 맡던 도중, 치안본부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ref>작성자 불명, 「全民學聯(전민학련) 공동의장 金吉寤(김길오)군 구속」 , 『동아일보』 , 1986년 7월 22일, 2024년 11월 29일 기사 확인.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722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7-22&officeId=00020&pageNo=7&printNo=19940&publishType=00020</ref>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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